권여선의 《안녕 주정뱅이》(창비, 2016)는 2013년 여름부터 2015년 겨울까지 발표한 일곱 편의 단편을 엮은 소설집이다.이 중 ‘이모’는 좌절된 연애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짐 지워진 이모의 삶을 보여준다.이모는 쉰다섯 살에 홀연 사라지기까지 결혼하지 않고 직장 생활을 하며 가족을 건사한다.하지만 돌아온 건 췌장암이라는 환자의 모습이었다.그러던 어느 날,편지 한 장 써 놓고 사라진다.
“당분간 모든 관계를 끊고 살겠다. 죽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그렇게 살아보고 싶다.”(78쪽)
이 짧은 문장은 그동안의 이모 삶을 짐작하게 한다.가족은 ‘나’를 존재하게 하고 ‘나’의 삶을 증명해 주는 이들이다.대부분 가족은 가장 가깝고 그 무엇으로도 떼놓을 수 없는 관계라고 생각한다.서로의 사랑과 신뢰,때로는 목숨을 바쳐서도 지키고 싶은 존재가 가족이다.가족을 위해 개인적인 삶을 묻어두고 가족 구성원으로서 역할 충실을 기꺼이 선택한다.가족이 나를 보호해 주는 울타리이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모는 자신의 삶을 착취했다고밖에 볼 수 없는 가족과의 연을 끊고 홀연히 사라진다.그리고 안산 외곽의 오래된 소형 아파트에서 수도자처럼 생활한다.
현대로 갈수록 가족은 더 이상 나를 지켜주는 울타리가 아니다.오히려 가족이 나를 잠식시키는 대상으로 변모하고 있다.그렇다면 왜 이렇게 가족에 대해 부정적일까. ‘이모’에서 그려지는 가족은,가족주의가 함의하고 있는 지배 집단의 이데올로기적 굴레라는 것을 알 수 있다.가족이란 이름으로 이모의 삶을 억압하고 침잠시킨다.이모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결혼도 하지 않고 어머니를 부양하고,평생 번 돈은 남동생의 도박 빚으로 잃는다.곤경에 처한 상황에서 이모가 가족에 대한 부양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천하에 몹쓸 인간,가족에 대한 애정은 눈곱만큼도 없는 파렴치한 인간으로 사회적 비난과 가족 구성원의 원성을 각오해야 한다.이런 굴레에서는 가족 간의 친밀감은 찾아볼 수가 없다.부양 책임을 가족에 대한 애정과 동일시하는 사회에서는 세상의 ‘이모’들은 설 자리가 없다. (전체보기)